아쟁쿠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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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쟁쿠르 전투는 1415년 10월 25일,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를 침공했고, 아르플뢰르 공성전 이후 칼레로 향하던 중 프랑스군과 맞닥뜨렸다.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을 활용하여 프랑스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 귀족 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등 프랑스 사회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아쟁쿠르 전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작품과 연구의 소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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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쿠르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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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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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전투명 | 아쟁쿠르 전투 |
로마자 표기 | Ajaengkureu jeontu |
프랑스어 표기 | Bataille d'Azincourt |
영어 표기 | Battle of Agincourt |
일부 | 백년 전쟁 |
날짜 | 1415년 10월 25일 (성 크리스핀의 날) |
장소 | 아쟁쿠르, 생폴 백국(현재의 파드칼레) |
좌표 | 50°27′49″N 2°8′30″E |
결과 | 잉글랜드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잉글랜드 왕국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헨리 5세 요크 공작 에드워드 토머스 카모이스 토머스 어핑엄 |
지휘관 2 | 샤를 달브레 장 르 맹그르 오를레앙 공작 샤를 알랑송 공작 장 1세 부르봉 공작 장 1세 |
병력 | |
병력 1 | 6,000–8,100명 (현대 추정) • 약 5/6 궁수 • 1/6 중무장 해체 기사 |
병력 2 | 14,000–15,000명 또는 무장한 하인을 포함하여 최대 25,000명 • 10,000 중무장 기사 • 4,000–5,000 궁수 및 석궁병 • 최대 10,000명 탑승 및 무장 하인 (그로 발레) |
사상자 | |
사상자 1 | 최대 600명 사망 (112명 확인) |
사상자 2 | • 6,000명 사망 (대부분 프랑스 귀족) • 700–2,200명 포로 |
2. 배경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협상이 결렬된 후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는 증조부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를 통해 프랑스 국왕 칭호를 주장했지만, 잉글랜드 국왕들은 프랑스가 아키텐 등 프랑스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414년 봄, 헨리 5세는 대평의회를 소집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을 논의했지만, 귀족들은 협상을 더 진행하고 주장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상에서 헨리는 프랑스가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잔 2세의 몸값으로 미지불된 을 지불하고 앙주, 브르타뉴, 플랑드르, 노르망디, 투렌 및 아키텐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 소유권을 인정하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어린 딸 카트린과 결혼하고 의 지참금을 받는 조건이었다.
프랑스는 카트린과의 결혼, 의 지참금, 확대된 아키텐을 제안했다. 1414년 12월, 잉글랜드 의회는 헨리 5세가 프랑스로부터 상속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세율의 두 배인 "이중 보조금"을 승인하도록 설득했다. 1415년까지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그들의 주장을 조롱하고 헨리 5세 자신을 조롱했다고 주장했다. 1415년 4월 19일, 헨리 5세는 다시 대평의회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고, 대평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1415년 8월 13일, 헨리 5세의 군대는 프랑스 북부에 상륙했다. 약 1만 2천 명의 병력과 최대 2만 마리의 말로 이루어진 군대는 아르플뢰르 항구를 포위했다.[13] 공성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려 9월 22일에 항복했고, 잉글랜드 군대는 10월 8일까지 떠나지 않았다. 전투 시즌이 끝나가고 있었고, 잉글랜드 군대는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겨울을 위해 영국으로 직접 돌아가는 대신, 헨리는 군대 대부분(약 9,000명)을 이끌고 노르망디를 통해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 항구로 행군했다. 이는 공국에서 통치할 그의 권리가 단순한 추상적인 법적, 역사적 주장 이상임을 보여주고, 아르플뢰르에서 헨리의 개인적인 결투 요청에 응답하지 않은 왕태자를 겨냥한 의도적인 전투 도발이었다.
공성전 동안 프랑스는 루앙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 군대는 봉건제 군대가 아닌, 잉글랜드와 유사한 시스템으로 급여를 받는 군대였다. 프랑스는 9,000명의 병력을 모집하려 했지만, 아르플뢰르를 구원할 시간에 준비되지 못했다.
헨리 5세가 북쪽으로 행군하자, 프랑스는 솜 강을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해 이동했다. 프랑스군은 헨리가 칼레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이동하여 여울을 찾도록 강요하며 한동안 잉글랜드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잉글랜드는 마침내 페롱느 남쪽 베탱쿠르와 보이엔에서 솜 강을 건너 북쪽으로 행군을 재개했다.
강이라는 전략적 이점이 없어지자 프랑스는 전투를 주저했다. 그들은 지역 귀족들에게 군대에 합류하도록 요청하는 ''세몽스 데 노블''[14]을 호출하면서 헨리의 군대를 따라다녔다. 10월 24일, 양 군대는 전투를 위해 서로 마주했지만, 프랑스는 더 많은 병력 도착을 기대하며 전투를 거절했다.
10월 24일 밤, 양 군대는 야외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프랑스는 지연 전술로 협상을 시작했지만, 헨리는 군대가 전진하여 전투를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잉글랜드는 식량이 거의 없었고, 2주 반 동안 약 418.43km를 행군했으며, 이질과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았고, 잘 장비된 프랑스 기사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열세였다. 프랑스 군대는 헨리가 칼레로 가는 길을 막았고, 전투를 지연시키는 것은 지친 잉글랜드 군대를 더욱 약화시키고 더 많은 프랑스 병력이 도착할 수 있게 할 뿐이었다.
2. 1.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요구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협상이 결렬된 후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는 증조부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를 통해 프랑스 국왕의 칭호를 주장했지만,[35] 실제로 잉글랜드 국왕들은 프랑스가 아키텐과 기타 프랑스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414년 봄, 헨리 5세는 대평의회를 소집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해 논의했지만, 귀족들은 그가 더욱 협상을 하고 주장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어진 협상에서 헨리 5세는 프랑스가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장 2세[36]의 몸값으로 미지불된 을 지불하고 앙주, 브르타뉴, 플랑드르, 노르망디, 투렌뿐만 아니라 아키텐의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어린 딸 카트린과 결혼하고 의 지참금을 받을 것이었다.
프랑스는 카트린과의 결혼, 의 지참금, 확대된 아키텐이라는 조건으로 응답했다. 1415년까지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37]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그들의 주장을 조롱하고 헨리 5세 자신을 조롱했다고 주장했다. 1414년 12월, 잉글랜드 의회는 헨리 5세가 프랑스로부터 상속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세율의 두 배인 "이중 보조금"을 승인하도록 설득되었다. 1415년 4월 19일, 헨리 5세는 다시 대평의회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번에는 그들이 동의했다.[38]
2. 2. 협상 결렬과 침공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협상이 결렬된 후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는 증조부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를 통해 프랑스 국왕의 칭호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잉글랜드 국왕들은 프랑스가 아키텐과 기타 프랑스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414년 봄, 헨리 5세는 대평의회를 소집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해 논의했지만, 귀족들은 그가 더욱 협상을 하고 주장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협상에서 헨리는 프랑스가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잔 2세의 몸값으로 미지불된 을 지불하고 앙주, 브르타뉴, 플랑드르, 노르망디, 투렌뿐만 아니라 아키텐의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37] 헨리는 카트린, 샤를 6세의 어린 딸과 결혼하고 의 지참금을 받을 것이었다.프랑스는 카트린과의 결혼, 의 지참금, 확대된 아키텐이라는 조건으로 응답했다. 1414년 12월, 잉글랜드 의회는 헨리가 프랑스로부터 상속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세율의 두 배인 "이중 보조금"을 승인하도록 설득되었다. 1415년까지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그들의 주장을 조롱하고 헨리 자신을 조롱했다고 주장했다.[37][38] 1415년 4월 19일, 헨리는 다시 대평의회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번에는 그들이 동의했다.[38]
헨리의 군대는 1415년 8월 13일 프랑스 북부에 상륙했다. 약 1만 2천 명의 병력과 최대 2만 마리의 말로 이루어진 군대는 아르플뢰르 항구를 포위했다.[13] 공성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이 도시는 9월 22일에 항복했고, 잉글랜드 군대는 10월 8일까지 떠나지 않았다. 전투 시즌이 끝나가고 있었고, 잉글랜드 군대는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겨울을 위해 영국으로 직접 돌아가는 대신, 값비싼 원정의 결과로 단 한 개의 도시만 점령한 헨리는 그의 군대 대부분(약 9,000명)을 노르망디를 통해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 항구로 행군하여 군대를 이끌고 그 지역에 그의 존재를 보여줌으로써 공국에서 통치할 그의 권리가 단순한 추상적인 법적, 역사적 주장 이상임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아르플뢰르에서 헨리의 개인적인 결투 요청에 응답하지 않은 왕태자를 겨냥한 의도적인 전투 도발로 이 기동을 계획했다.
공성전 동안 프랑스는 루앙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것은 봉건제 군대가 아니었지만, 잉글랜드와 유사한 시스템을 통해 지불받는 군대였다. 프랑스는 9,000명의 병력을 모집하기를 희망했지만, 군대는 아르플뢰르를 구원할 시간에 준비되지 않았다.[39]
헨리 5세가 북쪽으로 행군한 후, 프랑스는 솜 강을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해 이동했다. 그들은 한동안 성공하여 헨리가 칼레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이동하여 여울을 찾도록 강요했다. 잉글랜드는 마침내 페롱느 남쪽 베탱쿠르와 보이엔에서 솜 강을 건너 북쪽으로 행군을 재개했다.[39][40]
강이라는 전략적 이점이 없어지자 프랑스는 전투를 강행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들은 지역 귀족들에게 군대에 합류하도록 요청하는 ''세몽스 데 노블''[14]을 호출하면서 헨리의 군대를 따라다녔다. 10월 24일까지 양 군대는 전투를 위해 서로 마주했지만, 프랑스는 더 많은 병력의 도착을 기대하며 거절했다. 두 군대는 10월 24일 밤을 야외에서 보냈다. 다음 날 프랑스는 지연 전술로 협상을 시작했지만, 헨리는 자신의 군대가 전투를 피하거나 방어적으로 싸우기를 원했을 만큼 자신의 군대의 상태를 고려하여 군대가 전진하고 전투를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크레시 전투와 다른 유명한 장궁 승리는 이렇게 승리했다. 잉글랜드는 식량이 거의 없었고, 2주 반 동안 행군했으며, 이질과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았고, 잘 장비된 프랑스 기사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열세였다. 프랑스 군대는 헨리가 칼레로 가는 길을 막았고, 전투를 지연시키는 것은 그의 지친 군대를 더욱 약화시키고 더 많은 프랑스 병력이 도착할 수 있게 할 뿐이었다.
2. 3. 프랑스군의 대응과 솜 강 도하
헨리 5세는 1415년 8월 13일 약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프랑스에 상륙하여 하르플러 항구를 공격했다. 이 공성전은 예상보다 길어져 9월 22일에 항복을 받아냈고, 영국군은 10월 8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월동 준비가 필요했고, 영국군 내에는 질병이 만연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헨리 5세는 월동 장비를 구하기 위해 군대의 대부분(약 7천 명)을 북프랑스의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 항구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공성전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루앙 근교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봉건적 군대가 아니라 영국과 유사한 시스템을 통해 임금을 받는 군대였다. 프랑스군은 9천 명의 병력을 모으고자 했으나, 제때에 하르플러를 구원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헨리 5세가 북쪽으로 진군하자 프랑스군은 솜강 근교에서 영국군을 저지하려 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영국군의 도강을 막는 데 성공했고, 헨리 5세는 여울을 찾기 위해 칼레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영국군은 베덴쿠르와 보이네에 있는 페로네 남쪽에서 솜을 건너는 데 성공했고, 북쪽으로의 진군을 계속했다.[39][40] 강이라는 전략적 이점을 잃자 프랑스군은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프랑스군은 세몽스 데 노블 지역 귀족들의 군대를 소집하는 동시에 헨리 5세의 군대를 뒤쫓기 시작했다.
3. 전투
아쟁쿠르 전투는 당대의 기록, 특히 목격자들의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려져 있다. 전투 장소는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9]
전투 직후 헨리 5세는 양측 전령들을 소환하여 전투의 이름을 '아쟁쿠르(Azincourt)'로 정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두 기록은 부르고뉴 출신 장 르 페브르 드 생레미와 앙그랑 드 몽스트레레의 것이다. 영국 측 기록은 익명의 저자가 쓴 ''헨리 5세의 업적(Gesta Henrici Quinti)''에 나오는데, 왕실 사제가 쓴 것으로 추정되며 전투 당시 수송대에 있었을 것이다.
헨리 5세는 칼레로 가려 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게 방해받았다. 잉글랜드군은 이질, 체력 고갈, 거친 날씨로 고통받고 있었다.[41] 양측 군대 규모는 자료 부족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대체로 잉글랜드군 6,000~9,000명, 프랑스군 12,000~36,000명으로 추정되나, 잉글랜드군이 3배 이상 열세였다는 견해도 있다.[43]
전투는 트라메쿠르와 아쟁쿠르 숲 사이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다. 10월 24일 밤, 양측 군대는 평지에서 머물렀고, 잉글랜드군은 비 때문에 더 작은 숙소를 만들었다. 25일, 헨리 5세는 중무장 부대 900명과 장궁병 5,000명을 약 685.80m 좁은 길에 배치했다.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을 양 측면에, 중기병과 기사를 중앙에, 궁수 200명을 중앙에 배치하고, 목채를 비스듬히 박아 기병대 공격을 막았다.
잉글랜드군은 참회의 날로 여겨 스스로를 정화하려 했다. 헨리 5세는 귀족들에게 배상금을, 일반 병사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독려했다. 프랑스군은 병력, 장비, 귀족 중무장 부대의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승리를 확신했다.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귀족들의 복수심도 작용했다.
프랑스군은 3열 대형을 구성했으나, 좁은 전장 때문에 전력을 다 투입하기 어려웠다. 프랑스군에는 궁수와 석궁병이 많았지만, 백병전 위주로 싸우려 했다.[49] 전투 중 많은 프랑스 귀족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히자, 프랑스 군대 대다수는 도망쳤다.
좁고 수풀이 우거진 지형은 잉글랜드 군에게 유리했다.[51][52] 프랑스군은 밀집하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었고, 장궁병 사격에 혼란스러워하며 사상자가 늘었다. 전장 탐색에 따르면 밀집 대형은 진군 속도를 70% 감소시킨다.[53]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군은 밀집하여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54]
전투는 수풀이 우거지고 진창인 곳에서 벌어졌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걷는 것은 힘들었다. 깊고 부드러운 진흙은 영국군에게 유리했는데, 쓰러진 프랑스 기사들은 다시 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17]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트라메쿠르 숲과 아쟁쿠르 사이 좁은 개활지일 가능성이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아쟁쿠르 서쪽이라는 주장도 있다.[15]
꼼꼼한 작전을 세운 드루 백작이었지만, 프랑스군의 지휘 체계는 혼란스러웠다. 프랑스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헨리 5세는 잉글랜드군을 이동시켜 오전 중반에는 아쟁쿠르의 가장 좁은 지점, 즉 잉글랜드군 궁병의 사정권 안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잉글랜드군 궁병들은 말뚝을 박고, 이후 적의 경솔한 행동을 유도하듯이 사격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 궁병의 공격에 대응하여 프랑스군 중장기병이 양익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지형에서 매복한 잉글랜드군에게 중장기병은 초기 작전대로 우회할 수 없었다. 진흙탕 상태였던 지면과 그들 자신의 무거운 장비는 기병 속도를 늦추었고, 잉글랜드군이 설치한 말뚝과 쏟아지는 화살에 막혀 대부분의 중장기병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중장기병은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격하는 기마병과 보병 대부대의 진로를 방해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프랑스군 투석병들은 활용되지 못하고 전위 뒤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랑스군 보병의 공격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에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기마병과 보병 대부대는 원거리에서는 잉글랜드군 궁병에 의해 소모되었고, 근거리에서는 매복해 있던 잉글랜드군 기마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주력이 패한 것을 본 프랑스군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궁병조차 프랑스군 본대를 압박했고, 많은 귀족과 기사를 포로로 잡았다. 전투는 약 1시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지만, 프랑스군 한 부대가 잉글랜드군 후방으로 우회하여 수송대 차량을 약탈했기 때문에, 헨리 5세는 항복한 프랑스군 포로들이 다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도록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학살이 이어졌고, 잉글랜드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10월 25일 아침, 프랑스군은 여전히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라반트 공작, 앙주 공작, 브르타뉴 공작은 각각 1,000-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기 위해 진군 중이었다.
해가 뜨고 3시간이 지나도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헨리 5세는 잉글랜드군이 방어 위치를 잘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군대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프랑스 기병대가 목책을 설치하기 전에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파테 전투와 같은 재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진군에 허를 찔린 것으로 보인다. 지형의 협소함은 프랑스 군에게 제한된 배치를 강요했다.[57]
원래 전투 계획은 궁수와 석궁병을 중무장 부대 앞에 배치하고, 기병대를 후방에 배치하여 궁병들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수와 석궁병들이 중무장 부대 뒤와 측면에 배치되었고, 전투 시작 전에 몇 발의 화살을 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이 교차 사격을 실시한 후에야 돌격을 감행했다. 프랑스 연대기는 기병대 돌격이 있었지만, 참여 병력이 부족했다고 기록한다. 질 르 부비에(Gilles le Bouvier)는 다른 이들이 걷거나 말을 먹이고 있을 때 경고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었다고 말한다.[58]
프랑스 진영의 화살 사거리(약 약 274.32m)에 근접한 상태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목책을 설치하고, 활을 쏘며 교전을 시작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적절한 숫자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장궁병들에게 돌격했다. 그러나 이는 재난이었다. 프랑스 기사들은 수풀 때문에 장궁병들의 측면을 공격하지 못했고, 목책을 돌파하지 못했다. 존 키건은 장궁병들이 전투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말에게 부상을 입힌 것이라고 주장한다. 측면 고지대에서 사격이 시작되자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퇴각하기 위해 더 혼란스러운 상태로 진흙탕을 지나가야 했다. 베이커는 생 드니의 기록을 인용하여 패닉에 빠진 말들이 진군하는 보병들을 향해 돌진하여 분산시키고 짓밟았다고 말한다. 부르고뉴 사료에도 중무장 기병들이 퇴각하면서 프랑스군 전위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슷한 기록이 있다.[59]
프랑스 중무장 부대는 잉글랜드군 전열에 도착하여 밀어내려 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활을 내려놓고 백병전에 가담했다(약 3시간 동안). 이는 프랑스군이 수천의 화살 공격에도 적은 사상자로 진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화살이 갑옷을 강타하고 진흙을 돌파하면서 발생하는 열과 산소 부족은 프랑스군을 지치게 했고, 결국 영국군과의 교전에서 "무기를 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도끼와 칼 등 무기를 사용하는 잉글랜드 궁수들은 프랑스군을 공격했지만, 프랑스군은 갑옷을 입지 않은 그들을 공격하기 어려웠다. 기력이 다한 프랑스 중무장 보병대는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근접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 2열이 참여했으나, 좁은 지형은 병력 운용을 어렵게 했고, 수천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전투는 약 3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선봉부대 지휘관들처럼 2열 지휘관들도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했다. 영어로 된 게스타 헨리치는 세 무리의 시체 더미를 "사람 키만큼 시체가 쌓였다"고 묘사했다.[62]
전투에서 유명한 일화는 헨리 5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관련된 것이다. 헨리는 동생이 배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듣고 친위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을 돌파하여 동생을 지키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프랑스군은 아쟁쿠르 성에서 이상바르 다쟁쿠르(Ysembart d'Azincourt)[63]가 지휘하는 부대가 출격하여 헨리 5세의 보물을 운송하던 잉글랜드군 군수마차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기록은 이것이 전투 끝에 일어났고, 잉글랜드군에게 후방 공격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이커는 이 사건이 전투 시작 시점에 일어났다는 게스타 헨리치의 기록을 더 신뢰한다.
잉글랜드군이 초전의 승리를 거두고 헨리 5세가 프랑스군이 재집결하여 다시 공격할 것을 경계하는 것이 전투의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게스타 헨리치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중무장 보병대의 공격을 격퇴하고 프랑스군 후방 경비 부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부르고뉴 사료인 르 페브르와 와우린도 프랑스군 후방 부대가 재집결하며 진군함에 따라 잉글랜드군은 위험을 느꼈다고 기록한다.
3. 1. 전장 상황
헨리 5세와 그의 군대는 칼레로 가려 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게 방해받았다. 영국군은 이질, 체력 고갈, 거친 날씨로 고통받고 있었다.[41]믿을 만한 사료가 부족하여 양측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동시대 영국 사료는 영국군이 10배 이상 불리하다고 했으나, 부르고뉴 사료는 프랑스군 50,000명, 영국군 11,000-13,000명으로 평가한다.[41] 다른 프랑스 사료는 잉글랜드군이 약간 더 많았다고 기록하기도 한다.[42]
최근 연구는 영국군 6,000-9,000명, 프랑스군 12,000-36,000명으로 추정한다. 앤 커리(Anne Curry)는 프랑스군이 12,000명, 잉글랜드군이 9,000명으로 4대 3 정도의 병력 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영국 역사가들은 여전히 잉글랜드군이 3배 이상의 수적 열세였다고 믿는다.[43]
전투는 트람쿠르와 아쟁쿠르(현재의 아쟁쿠르 마을 근처) 숲 사이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칼레로 가는 북쪽 출구를 막기 위해 배치되었다. 8월 24일 밤, 양측 군대는 평지에서 머물렀고, 잉글랜드군은 비 때문에 더 작은 숙소를 만들었다.
25일, 헨리는 군대(중무장 부대 900명, 장궁병 5,000명)를 좁은 길 750야드에 배치했다.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을 양 측면에, 중기병과 기사를 중앙에, 궁수 200명을 중앙에 배치했다. 중무장 부대는 4열로 밀집 배치되었고, 궁수들은 목채를 비스듬히 박아 기병대 공격을 막았다.
잉글랜드군은 겁에 질려 있었고, 참회의 날로 여겨 스스로를 정화하려 했다. 헨리 5세는 귀족들에게 프랑스가 이기면 배상금을 지불할 것이라고 연설했지만, 일반 병사들에게는 목숨을 위해 싸우라고 말했다.
프랑스군은 승리를 확신하며 전투를 바랐다. 병력이 많고 활기 넘치며 장비가 좋고, 귀족 중무장 부대가 많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영국군은 중무장 부대가 약 1,000명이었지만, 프랑스군은 최소 10,000명(1,200명은 기마)이었다.[44][45]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귀족들의 복수심도 작용했다.
프랑스군은 3열 대형을 구성했다. 보랭(Jehan de Waurin)에 따르면 선봉은 중무장 병사 8,000명, 궁수 4,000명, 석궁병 1,500명, 양 측면에 승마 중무장 병사 600명과 800명, 주력은 선봉과 같은 수의 기사, 지휘관, 궁수, 후위에는 남은 중무장 부대가 있었다.[47] 베리의 헤럴드는 선봉 4,800명, 중간 3,000명, 양측면 중기병 600명, 총 10,000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48]
후위에는 일반병 수천 명이 있었지만, 배치되지 않았거나 배치할 의사가 없었다. 와우린은 프랑스군이 50,000명이었다고 추산한다. 프랑스군에는 궁수와 석궁병이 많았지만, 좁은 전장 때문에 백병전 공간만 있어 사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49]
전투 중 많은 프랑스 귀족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히자, 프랑스 군대 대다수는 도망쳤다.
좁고 수풀이 우거진 지형은 잉글랜드 군에게 유리했다.[51][52] 영국 중무장 부대 900명은 4열로 밀집했고, 나머지 부분은 목책 뒤 장궁병으로 채워졌다. 프랑스군 선봉은 4,000-8,000명이었지만, 3개 전열로 나뉘어 전군을 투입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밀집하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었고, 장궁병 사격에 혼란스러워하며 사상자가 늘었다. 전장 탐색에 따르면 밀집 대형은 진군 속도를 70% 감소시킨다.[53] 프랑스군은 영국 중무장 부대와 싸워야 했고,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밀집하여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54]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자 혼란은 더 심해졌다.
전투는 수풀이 우거지고 진창인 곳에서 벌어졌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걷는 것은 힘들었다. 깊고 부드러운 진흙은 영국군에게 유리했는데, 쓰러진 프랑스 기사들은 다시 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베이커(Barker)는 일부 기사들이 진흙탕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트라메쿠르 숲과 아쟁쿠르 사이 좁은 개활지일 가능성이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아쟁쿠르 서쪽이라는 주장도 있다.[15] 2019년 역사학자 마이클 리빙스턴은 아쟁쿠르 서쪽 지역을 전투 장소로 지목했다.[16]
전장의 지형은 전투 결과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빽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최근에 갈아엎은 땅은 좁은 지형과 프랑스 기사들이 걸어야 하는 두꺼운 진흙 때문에 영국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전투에 대한 기록들은 프랑스군이 영국 장창병들과 교전한 후, 혼전이 벌어지면서 장궁병들이 측면에서 공격해 들어왔다고 묘사한다. '''헨리의 업적''''(Gesta Henrici)에 있는 영국 측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일부가 전사하여 앞쪽에 쓰러지자, 그 뒤에 있던 대규모 병력의 무질서한 폭력과 압력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산 자가 죽은 자 위에 쓰러졌고, 다른 이들이 산 자 위에 쓰러져서 역시 죽었다."
프랑스군이 처음에는 영국군을 밀어붙였지만, 너무 밀집되어 제대로 무기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묘사된다. 생드니의 프랑스 수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선봉대는 처음에 너무 밀집되어 3열에 있는 사람들은 겨우 검을 사용할 수 있었다,"[17] 그리고 부르고뉴 측 자료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최근 폭우로 전장은 매우 진흙탕이 되었고, 완전한 판금갑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생드니의 프랑스 수도사는 프랑스군을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속을 행군했다. 그래서 적과 교전하기도 전에 이미 피로에 지쳐 있었다"고 묘사한다. 깊고 부드러운 진흙은 특히 영국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일단 쓰러진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은 혼전 속에서 다시 일어나 싸우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커는 일부 기사들은 갑옷에 짓눌려 투구 속에서 실제로 익사했다고 말한다.
꼼꼼한 작전을 세운 드루 백작이었지만, 프랑스군의 지휘 체계는 혼란스러웠다. 프랑스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헨리 5세는 잉글랜드군을 이동시켜 오전 중반에는 아쟁쿠르의 가장 좁은 지점, 즉 잉글랜드군 궁병의 사정권 안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잉글랜드군 궁병들은 말뚝을 박고, 이후 적의 경솔한 행동을 유도하듯이 사격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 궁병의 공격에 대응하여 프랑스군 중장기병이 양익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지형에서 매복한 잉글랜드군에게 중장기병은 초기 작전대로 우회할 수 없었다. 진흙탕 상태였던 지면과 그들 자신의 무거운 장비는 기병 속도를 늦추었고, 잉글랜드군이 설치한 말뚝과 쏟아지는 화살에 막혀 대부분의 중장기병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중장기병은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격하는 기마병과 보병 대부대의 진로를 방해하여 혼란을 야기했다. 프랑스군 투석병들은 활용되지 못하고 전위 뒤에 배치되어 있었다.
프랑스군 보병의 공격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에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기마병과 보병 대부대는 원거리에서는 잉글랜드군 궁병에 의해 소모되었고, 근거리에서는 매복해 있던 잉글랜드군 기마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주력이 패한 것을 본 프랑스군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궁병조차 프랑스군 본대를 압박했고, 많은 귀족과 기사를 포로로 잡았다. 전투는 약 1시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지만, 프랑스군 한 부대가 잉글랜드군 후방으로 우회하여 수송대 차량을 약탈했기 때문에, 헨리 5세는 항복한 프랑스군 포로들이 다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도록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학살이 이어졌고, 잉글랜드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3. 2. 양측 군대 배치
헨리 5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칼레로 가려 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이 이를 막으려 했다. 잉글랜드군은 적대적인 지역에서 18일 동안 250마일을 행군하며 계속 공격을 받아 이질, 체력 고갈, 거친 날씨로 고통받고 있었다.믿을 만한 자료가 부족하여 양측 군대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동시대 잉글랜드 자료는 잉글랜드군이 10배 이상 수적으로 불리했다고 주장한다. 부르고뉴 자료는 프랑스군 50,000명, 잉글랜드군 11,000~13,000명으로 평가한다.[41] 다른 프랑스 자료는 잉글랜드군이 약간 더 많았다고 기록하기도 하고,[42] "영국군과 아주 비등비등한 상황"이었다고 적기도 한다.[42]
최근 연구는 잉글랜드군 6,000~9,000명, 프랑스군 12,000~36,000명으로 추정한다. 앤 커리(Anne Curry)는 프랑스군이 4대 3 정도(프랑스군 12,000명, 잉글랜드군 9,000명)로 유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근대 영국 역사가들은[43] 여전히 잉글랜드군이 3배 이상의 수적 열세였다고 믿는다.
전투는 트람쿠르와 아쟁쿠르(현재의 아쟁쿠르 마을 근처) 숲 사이 좁은 통로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달브레의 명에 따라 북쪽 출구를 봉쇄했다. 8월 24일 밤, 양측 군대는 평지에서 머물 곳을 만들었고, 잉글랜드군은 호우로 인해 더 작은 임시 숙소를 만들었다.
25일 아침, 헨리는 900명의 중무장 부대와 5,000명의 장궁병을 좁은 길 약 685.80m에 걸쳐 배치했다.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을 양 측면에, 중기병과 기사를 중앙에, 200명의 궁수를 중앙에 배치했다. 잉글랜드 중무장 부대는 4열로 밀집 배치되었다. 양 측면 궁수들은 기병대 이탈을 막기 위해 비스듬히 목채를 박았다.
잉글랜드군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겁에 질려 있었다. 전투 전날은 참회의 날로, 모든 병사들은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정화하려 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포로로 잡힐 경우 몸값을 낼 수 있어 행운이었다. 프랑스 자료에 따르면, 헨리 5세는 귀족들에게 프랑스가 이기면 잡힌 귀족들이 풀려나도록 배상금을 지불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은 그런 행운이 없기에, 목숨을 위해 싸우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프랑스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전투를 바라고 있었다. 병력이 많고 활기 넘치며 장비가 좋고, 장궁병과 같은 일반병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귀족 중무장 부대가 많다는 점에서였다. 잉글랜드군은 약 1,000명의 중무장 부대가 참여했고, 프랑스군은 가장 적게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44] 10,000명의 중무장 부대(1,200명은 말을 타고 있었다)가 있었다.[45] 백병전에 유리한 중무장 부대가 많아 더욱 자신감을 가졌다.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많은 프랑스 귀족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패배했기에, 프랑스 귀족들은 보복을 원했다. 몇몇 프랑스 기록들은 프랑스 지휘관들이 잉글랜드군을 패배시키기를 원해 선봉에 서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배틀즈"라 불린 3열 대형을 구성했다. 보랭(Jehan de Waurin)에 따르면 8,000명의 중무장 병사, 4,000명의 궁수, 1,500의 석궁병이 양 측면에 600명과 800명의 승마한 중무장 병사들과 함께 선봉을 이루었고, 주력 배틀은 "선봉과 같은 수의 기사와 지휘관, 궁수"가 있었고, 후위에는 "남은 모든 중무장 부대"가 있었다.[47] 베리의 헤럴드는 4,800 중무장부대가 선봉, 3,000명이 중간, 양측면 600명 중기병, 총 10,000명 중무장 부대로 프랑스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48] 헤럴드는 세 번째 열은 언급하지 않는다.
후위에는 일반병을 포함하여 수천의 병력이 있었으나, 프랑스군은 배치하지 않았다. 와우린은 프랑스군 전 병력이 50,000명 정도였다고 추산한다. 성 드니 신부 또한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다.
후방에는 전투 장소가 거의 없었으나, 영국과 프랑스 기록 모두 전투 중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힌 것을 보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도망쳤다는 데 동의한다.
지형은 좁고 수풀이 우거져 잉글랜드 군에게 유리했다.[51][52] 전장 탐색(Battlefield Detectives) 연구는 전장에 많은 병사들이 들이닥쳐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본다.[53] 900명의 영국 중무장 부대는 4열로 밀집해, 둘로 나뉜 궁수들 사이에 1열당 225명씩 좁은 열을 구성했을 것이다. 전장 나머지에는 목책 뒤 장궁병이 있었다. 프랑스군 선봉은 4,000-8,000명 중무장 부대로, 영국 중무장 부대보다 4배 이상 많았으나, 측면 공격 방법이 없었다. 3개 전열로 나뉜 프랑스군은 한꺼번에 투입할 수 없었다. 최초 교전은 영국군과 프랑스군 선봉 사이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 2열은 전진 준비를 했고, 병사들은 근접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었다. 선봉대 사상자는 장궁병 사격에 의해 혼잡한 상황에서 늘었고, 병사들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전장 탐색은 병사들이 방진을 치고 밀집해 있을 때 전진 공간이 없어 진군속도가 70%로 떨어진다고 한다.[53] 전투 기록들은 프랑스군은 영국 중무장 부대와 싸워야 했고, 싸움은 격렬해졌다고 묘사한다.
프랑스군은 처음에 영국군을 몰아붙였지만, 너무 밀집해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기 어려웠다. 부르고뉴 자료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전장은 모든 병력이 투입되어 싸울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프랑스군은 영국군 장궁병들이 백병전에 참여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자 혼란은 더 심해졌다. 뒤로부터 밀려드는 병사들은 전위 전투를 방해하였다.
전투는 수풀이 우거지고 최근 비로 진창이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걷는 것은 힘들었다. 성 드니는 프랑스군을 "무릎까지 진흙이 올라온 상태로 진군했다. 그래서 적들에게 진군하기 전에 이미 지쳐있었다."라고 묘사했다.[55] 진흙은 영국군에게 유리했는데,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이 쓰러지면 다시 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2005년 베이커(Barker)는 몇몇 기사들은 중무장 갑옷 때문에 진흙탕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제한된 이동성은 잉글랜드 궁수들의 쉬운 목표가 되게 했다. 진흙은 가볍게 무장한 잉글랜드 궁수들이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과 백병전을 벌이는 능력을 증대시켰다.
25일 이른 아침, 헨리 5세는 약 1,500명의 기사(man-at-arms)와 7,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English longbowmen)으로 구성된 군대를 약 약 685.80m 길이의 협로(defile)에 배치했다. 군대는 세 부대로 나뉘었는데, 우익은 요크 공작 에드워드, 중앙은 국왕 자신이, 좌익은 노련한 베테랑 케모이스 남작이 이끌었다. 궁수대는 또 다른 노련한 베테랑인 터마스 어핑엄 경(Sir Thomas Erpingham)이 지휘했다. 잉글랜드군은 양쪽 측면에 장궁병을, 중앙에 기사와 기병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전투 대형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앙에도 일부 궁수를 배치했을 수도 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잉글랜드 기병들은 어깨를 맞대고 4열로 배치되었다. 양쪽 측면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궁수들은 말뚝(archer's stake) 또는 울타리(palings)를 땅에 비스듬히 박아 기병대의 돌격을 방해했다. 이러한 말뚝 사용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프랑스 기병대에 사용한 전술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
관례대로 잉글랜드군은 전투 전에 고해성사를 치렀다. 적의 기습 공격을 우려하고 군대의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헨리 5세는 모든 병사들에게 전투 전날 밤 침묵을 지킬 것을 명령했으며, 이를 어기면 귀를 베겠다고 했다. 그는 포로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는 것보다 전투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헨리 5세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강조하고 잉글랜드 왕들이 프랑스에 입힌 이전의 큰 패배들을 상기시키는 연설을 했다. 부르고뉴 출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연설을 마무리하며 프랑스인들이 장궁병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잘라 다시는 장궁을 쏠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병사들은 대부분 죽는 것이 일반적인 운명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군은 1만 명의 기사(men-at-arms)와 4,000~5,000명의 잡병 보병(gens de trait) (궁수, 석궁병, 방패병 포함) 등 총 1만 4,000~1만 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아마도 각 기사는 무장한 시종인 그로 발레(gros valet) 또는 바렛(varlet)을 한 명씩 거느렸을 것이므로, 전투원으로서 잠재력을 가진 1만 명이 더 추가될 수 있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전투원 수에서 이들을 제외하기도 한다.
프랑스군은 선봉대와 후위대라는 두 개의 주요 부대(전투 부대)로 조직되었는데, 모두 주로 도보 전투를 하는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양쪽 측면에는 같은 기사들이 배치되었다. 영국 궁수들의 진형을 붕괴시켜 보병의 전진을 위한 길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특별한 정예 기병대가 있었다. 두 번째로 규모가 작은 기병대는 영국군 후방과 그들의 수하 및 보급품을 공격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많은 귀족과 신사들이 영광과 값진 몸값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최전선에 배치될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최전선에 집중되었고, 남은 공간이 없던 다른 병력들은 그 뒤에 배치되었다. 원래 궁수와 석궁병은 보병 측면에 배치될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불필요하다고 여겨져 그들의 뒤에 배치되었다. 공간 부족으로 프랑스군은 제3의 전투 부대인 후위대를 편성했는데, 이 부대는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주로 앞서 도보 전투를 하는 기사들의 말을 탄 시종들로 이루어졌다.
프랑스군 선봉대와 주력 부대는 각각 4,800명과 3,000명의 기사로 구성되었다. 두 부대 모두 약 16열의 밀집된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서로 활쏘기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알브레, 부시코와 거의 모든 주요 귀족들은 선봉대에 배치되었다. 알랑송 공작과 바르 백작이 주력 부대를 지휘했다. 추가로 600명의 기마 기사가 각 측면에 배치되었는데, 좌익은 반돔 백작이, 우익은 리슈몽 백작이 지휘했다. 적 궁수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클리네 드 브레방과 루이 드 보스레동이 이끄는 800~1,200명의 정예 기사 기병대가 선봉대의 양쪽 측면에 고르게 배치되었다(마치 뿔처럼 약간 앞으로 나와 있었다). 약 200명의 기마 기사가 영국군 후방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프랑스군은 나머지 병력의 배치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휘관이 없는 후위대는 잉여 병력을 위한 "투기장" 역할을 했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최우선 과제는 하마한 기사와 장궁을 든 궁병의 연계라는 잉글랜드군의 기본 전술을 어떻게 꺾느냐였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그들은 그 방법을 모색해 왔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는 프랑스군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 싸웠지만, 대형이 혼란스러워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국왕 장 2세가 포로가 되는 결과로 끝났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중앙에 하마한 기사와 보병으로 구성된 대부대를, 좌우에 중장갑 기병대를 배치했다. 프랑스군 샤를 1세와 프랑스 원수 (통칭 부시코)가 고안한 작전은, 중앙 대부대가 정면에서 잉글랜드군을 공격하는 동안, 중장갑 기병이 적의 후방으로 돌아가 궁병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장궁 사격을 무효화하기 위해, 중장갑 기병은 말에도 말갑옷을 입혔다. 헨리 5세는 포로로부터 얻은 정보로 프랑스군의 작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헨리 5세는 모든 궁병에게 약 1.8m 길이의 말뚝을 휴대하도록 명령했다. 말뚝은 양쪽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프랑스군의 중장기병이 왔을 때 땅에 박아 기마 돌격을 어렵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헨리 5세는 말뚝을 휴대하는 전술을 1396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착안했다고 전해진다. 니코폴리스 전투에서는 십자군의 기마 돌격에 예니체리 궁병이 수많은 말뚝을 땅에 박아 대항했다. 헨리 5세는 이 전술을 발전시킨 것이다.
헨리 5세는 V자 형태로 중앙에 기마병을 내리고 싸우는 부대를, 좌우에 궁병 부대를 배치했다.
3. 3. 전투 경과
지형은 아쟁쿠르 전투의 결과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좁은 전장은 빽빽한 수풀로 둘러싸여 있었고, 이는 잉글랜드 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51][52] 전장 탐색(Battlefield Detectives) 연구에 따르면,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 몰려들어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53] 900명의 영국 중무장 부대는 4열로 밀집해 있었는데, 이는 아마 둘로 나뉜 궁수들 사이에 1열당 225명씩 좁은 열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장에는 목책 뒤에 장궁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의 선봉은 4,000-8,000명 정도의 중무장 부대로, 영국군보다 훨씬 많았지만, 측면 공격이 불가능했다. 프랑스군은 세 개의 전열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군을 한꺼번에 투입할 수 없었다.최초의 교전은 영국군과 프랑스군 선봉 사이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 2열은 전진 준비 중이었으나, 병사들이 너무 근접해 있어 효과적으로 싸우기 어려웠다. 선봉대의 사상자는 장궁병들의 사격으로 인해 더욱 늘어났고, 병사들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전장 탐색 연구에 따르면, 병사들이 밀집해 있을 때 진군 속도가 70% 정도 떨어진다고 한다.[53] 전투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영국 장궁병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영국 중무장 부대와 싸워야 했고, 전투는 격렬해졌다. 프랑스군은 초기에 영국군을 밀어붙였지만, 너무 밀집해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부르고뉴 측 자료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전장은 모든 병력이 투입되어 싸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영국 장궁병들이 백병전에 참여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했지만,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뒤에서 밀려드는 병사들은 전위의 전투를 방해했다.
전투는 수풀이 우거지고 비가 내려 진창인 곳에서 벌어졌다. 이런 곳에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걷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성 드니는 프랑스군을 "그들의 무릎까지 진흙이 올라온 상태로 진군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맞서는 적들에게 진군하기 전에 이미 지쳐있었다."라고 묘사했다.[55] 깊고 부드러운 진흙은 영국군에게 유리했는데,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이 쓰러지면 다시 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베이커(Barker)는 몇몇 기사들이 갑옷 때문에 진흙탕에 빠져 죽었다고 주장한다. 제한된 이동성은 잉글랜드 궁수들의 쉬운 목표가 되게 했고, 진흙은 가볍게 무장한 잉글랜드 궁수들이 백병전을 벌이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10월 25일 아침, 프랑스군은 여전히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라반트 공작, 앙주 공작, 브르타뉴 공작은 각각 1,000-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기 위해 진군 중이었다.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군을 향해 진군할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해가 뜨고 3시간이 지나도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이 함정을 설치했거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이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헨리 5세는 잉글랜드군이 방어 위치를 잘 잡고 있다는 것을 프랑스군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군대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이 움직임은 궁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목책[56]을 다시 뽑고, 선택한 방어 위치를 포기하게 했다. 프랑스 기병대가 목책을 설치하기 전에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파테 전투와 같은 재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진군에 허를 찔린 것으로 보인다. 지형의 협소함은 프랑스 군에게 제한된 배치를 강요했다.[57]
원래 전투 계획은 궁수와 석궁병을 중무장 부대 앞에 배치하고, 기병대를 후방에 배치하여 궁병들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수와 석궁병들이 중무장 부대 뒤와 측면에 배치되었고, 전투 시작 전에 몇 발의 화살을 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이 교차 사격을 실시한 후에야 돌격을 감행했다. 프랑스 연대기는 기병대 돌격이 있었지만, 참여 병력이 부족했다고 기록한다. 질 르 부비에(Gilles le Bouvier)는 다른 이들이 걷거나 말을 먹이고 있을 때 경고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었다고 말한다.[58]
프랑스 진영의 화살 사거리(약 약 274.32m)에 근접한 상태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목책을 설치하고, 활을 쏘며 교전을 시작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적절한 숫자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장궁병들에게 돌격했다. 그러나 이는 재난이었다. 프랑스 기사들은 수풀 때문에 장궁병들의 측면을 공격하지 못했고, 목책을 돌파하지 못했다. 존 키건은 장궁병들이 전투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말에게 부상을 입힌 것이라고 주장한다. 측면 고지대에서 사격이 시작되자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퇴각하기 위해 더 혼란스러운 상태로 진흙탕을 지나가야 했다. 베이커는 생 드니의 기록을 인용하여 패닉에 빠진 말들이 진군하는 보병들을 향해 돌진하여 분산시키고 짓밟았다고 말한다. 부르고뉴 사료에도 중무장 기병들이 퇴각하면서 프랑스군 전위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슷한 기록이 있다.[59]
사령관은 직접 말을 타지 않은 프랑스 중무장 부대를 지휘했다. 프랑스 기록들은 전위가 약 5,000명으로, 잉글랜드군보다 5배 많았다고 묘사하지만, 그들은 화살이 쏟아지는 진창을 건너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프랑스 중무장 부대의 갑옷은 르 페브르(Le Fevre)와 보랭(Waurin)이 묘사했다. 이런 갑옷은 "끔찍한 화살의 우박"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 전열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54] 그러나 투구를 내려쓰고 얼굴을 보호하는 것은 호흡과 시야를 제약했고, 그들은 약 22.68kg 에서 약 27.22kg 무게의 갑옷을 입고 진흙을 걸어가야 했다.[61]
프랑스 중무장 부대는 잉글랜드군 전열에 도착하여 밀어내려 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활을 내려놓고 백병전에 가담했다(약 3시간 동안). 이는 프랑스군이 수천의 화살 공격에도 적은 사상자로 진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화살이 갑옷을 강타하고 진흙을 돌파하면서 발생하는 열과 산소 부족은 프랑스군을 지치게 했고, 결국 영국군과의 교전에서 "무기를 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도끼와 칼 등 무기를 사용하는 잉글랜드 궁수들은 프랑스군을 공격했지만, 프랑스군은 갑옷을 입지 않은 그들을 공격하기 어려웠다. 기력이 다한 프랑스 중무장 보병대는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근접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 2열이 참여했으나, 좁은 지형은 병력 운용을 어렵게 했고, 수천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전투는 약 3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선봉부대 지휘관들처럼 2열 지휘관들도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했다. 영어로 된 게스타 헨리치는 세 무리의 시체 더미를 "사람 키만큼 시체가 쌓였다"고 묘사했다.[62]
전투에서 유명한 일화는 헨리 5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관련된 것이다. 헨리는 동생이 배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듣고 친위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을 돌파하여 동생을 지키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프랑스군은 아쟁쿠르 성에서 이상바르 다쟁쿠르(Ysembart d'Azincourt)[63]가 지휘하는 부대가 출격하여 헨리 5세의 보물을 운송하던 잉글랜드군 군수마차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기록은 이것이 전투 끝에 일어났고, 잉글랜드군에게 후방 공격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이커는 이 사건이 전투 시작 시점에 일어났다는 게스타 헨리치의 기록을 더 신뢰한다.
잉글랜드군이 초전의 승리를 거두고 헨리 5세가 프랑스군이 재집결하여 다시 공격할 것을 경계하는 것이 전투의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게스타 헨리치는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중무장 보병대의 공격을 격퇴하고 프랑스군 후방 경비 부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부르고뉴 사료인 르 페브르와 와우린도 프랑스군 후방 부대가 재집결하며 진군함에 따라 잉글랜드군은 위험을 느꼈다고 기록한다.
4. 전투의 결과
헨리 5세는 몇몇 유명 인사를 제외한 수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포로 대부분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헨리 5세는 이들이 전장에 흩어진 무기로 다시 무장하여 지친 잉글랜드군을 압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잔혹한 일이었지만, 당시 전투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조차 헨리 5세를 비난하지 않았다.[64] 이 사건은 전투의 종결을 의미했으며, 프랑스 귀족들이 사로잡히고 살해당한 것을 본 프랑스군 후방 부대는 전장을 떠났다.
믿을 만한 사료가 없기 때문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측의 사상자에 대한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수적으로 불리했고, 프랑스군보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 측 기록은 프랑스군 사망자를 4,000~10,000명, 잉글랜드군 사망자를 약 1,600명으로 추정하여 6대 1 이상의 피해 비율을 보인다. 반면 잉글랜드 측 기록은 프랑스군 사망자를 1,500~11,000명, 잉글랜드군 사상자는 100명을 넘지 않는다고 기록하여, 최저치로 계산하면 50대 1 이상의 피해 비율을 보인다.[65]
베이커는 기록을 통해 전투 중 부상자를 제외하고 적어도 112명의 잉글랜드군이 사망했음을 밝혀냈다.[66] 가장 널리 인정되는 잉글랜드군 사상자 수는 450명 정도로, 6,000명의 군대 규모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치이지만, 프랑스군이 수천 명 사상하거나 포로로 잡힌 것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이다. 프랑스 측 기록에서 가장 적은 사망자 수치인 4,000명을 대입해도 피해 비율은 9대 1이며, 포로를 합치면 10대 1을 넘는다.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참패했다. 약 6,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한 역사가는 사상자 명단을 두고 "지난 세대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의 명단과 같다"라고 언급했다.
전투는 잉글랜드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복잡했다. 헨리 5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개선식을 통해 환영받았고,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휴전이 깨졌다. 아르마냐크파는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고, 부르고뉴 공 장(용맹공)이 이끄는 부르고뉴파는 이 기회를 틈타 파리로 진격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분열은 헨리 5세가 새로운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했다.
4. 1. 프랑스군의 피해
프랑스군의 피해는 상당했다. 사령관을 포함하여 3명의 공작, 5명의 백작, 90명의 남작이 전사했다. 포로는 700명에서 2,200명 사이로 추산되는데, 이 중에는 오를레앙 공작과 프랑스 원수 장 르 맹그르(Jean Le Maingre)가 포함되어 있었다.[67] 포로 대부분은 귀족이었는데, 이는 중요하지 않은 포로들은 학살당했기 때문이다.믿을 만한 사료가 없어 정확한 사상자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잉글랜드군이 수적으로 불리했고, 프랑스군보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 기록은 프랑스군 사망자를 4,000명에서 10,000명으로, 잉글랜드군 사망자를 약 1,600명으로 추정하여 6대 1 이상의 피해 비율을 보인다. 잉글랜드 기록은 프랑스군 사망자를 1,500명에서 11,000명, 잉글랜드군 사상자를 100명 이하로 추정하여, 최저치로 계산하면 50대 1 이상의 피해 비율을 보인다.[65]
베이커는 기록을 통해 전투 중 최소 112명의 잉글랜드군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66] 가장 널리 인정되는 잉글랜드군 사상자 수는 450명이다. 이는 6,000명의 군대 규모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치이지만, 수천 명이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한 프랑스군에 비하면 훨씬 적다. 프랑스 기록의 최소 사망자 수치인 4,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피해 비율은 9대 1이며, 포로를 포함하면 10대 1을 넘는다.
헨리 5세는 전투 후 프랑스 포로 대부분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포로들이 전장에 흩어진 무기로 다시 무장하여 지친 잉글랜드군을 압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조차 이례적으로 헨리 5세를 비난하지 않았는데,[64] 이는 당시 전투 상황에서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조치였음을 시사한다.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신분 | 이름 | 비고 |
---|---|---|
프랑스 대무관장 겸 드뢰 백작 | 샤를 1세 달브레 | 프랑스군 총사령관 |
브라반트 공작 | 부르고뉴의 앙투안 | 용감공의 동생 |
느베르 백작 겸 레텔 백작 | 부르고뉴의 필리프 | 용감공과 앙투안의 동생 |
알랑송 공작 | 장 1세 | |
바르 공작 | 에두아르 3세 | 바르 공국은 그의 죽음으로 독립 상실 |
프랑스 원수 | 장 2세 드 르 마랑 | 부시코(Boucicaut) |
오를레앙 공작 | 샤를 | |
부르봉 공작 | 장 1세 | |
외 백작 | 샤를 다르투아 | |
리치몬드 백작 | 아르튀르 |
4. 2. 잉글랜드군의 피해
잉글랜드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사료 부족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프랑스군보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프랑스 측 기록에는 프랑스군이 4,000~10,000명, 잉글랜드군이 약 1,600명 정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피해 비율이 6대 1을 넘는다. 반면 잉글랜드 측 기록에는 프랑스군 사망자가 1,500~11,000명, 잉글랜드군 사상자는 100명을 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피해 비율이 최대 50대 1을 넘는다.[65]베이커는 기록을 통해 전투 중 부상자를 제외하고 적어도 112명의 잉글랜드군이 사망했음을 밝혀냈다.[66] 널리 인정되는 잉글랜드군의 피해 규모는 사상자 450명 정도로, 6,000명의 군대 규모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치이지만, 프랑스군이 수천 명 사상하거나 포로로 잡힌 것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이다. 프랑스 측 기록에서 가장 적은 사망자 수치인 4,000명을 대입해도 피해 비율은 9대 1이며, 포로를 합치면 10대 1을 넘는다.
전투에서 사망한 주요 잉글랜드 측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요크 공작 에드워드 오브 노리치
-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4. 3. 정치적 영향
헨리 5세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최고위급 포로를 제외한 수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포로 대부분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헨리 5세는 포로들이 전장에 흩어진 무기를 줍고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지친 잉글랜드군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64] 당시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 5세의 이러한 결정을 비난하지 않았다.[64]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참패했다. 프랑스군 사령관을 포함하여 3명의 공작, 5명의 백작, 90명의 남작이 전사했다.[67] 포로는 700명에서 2,200명 사이로 추산되며, 이 중에는 오를레앙 공작과 프랑스 원수 장 르 맹그르가 포함되어 있었다.[67] 반면 잉글랜드 측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군 사상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65]
군사적으로는 결정적인 승리였지만, 그 영향은 복잡했다. 헨리 5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개선식을 통해 환영받았고,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휴전이 깨졌다. 아르마냐크파는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고, 부르고뉴 공 장(용맹공)이 이끄는 부르고뉴파는 이 기회를 틈타 파리로 진격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분열은 헨리 5세가 새로운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군은 대패하여 총사령관인 드루 백작이 전사하고, 원수 부시코는 포로로 잡혔다.[29] 전사자는 1만 명이 넘었고, 포로는 공작 3명, 백작 7명, 대귀족 220명, 기사 1560명에 달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있던 아르마냐크파는 이 패전으로 세력이 약해졌다.
5. 현대의 재고찰
앤 커리(Anne Curry)는 저서 《아쟁쿠르, 새로운 역사》(Agincourt, A New History, 2005)에서 아쟁쿠르 전투에 대한 기존 역사학계의 주장에 반박하며, 영국의 승리가 6세기 동안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68][69] 커리는 동시대 명령기록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이 여전히 수적 우위에 있었지만, 그 비율은 이전의 6대 1이 아닌 3대 2(프랑스군 12,000명 대 잉글랜드군 7,000~9,000명) 정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아쟁쿠르 전투가 "헨리 왕의 업적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평가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는 "우리는 적고, 우리의 행복은 작으나, 우리는 형제이다(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라는 대사를 통해 잉글랜드군의 수와 사상자 수를 과장하며, 이러한 인식이 영국 대중문화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72]
줄리엣 베이커는 《아쟁쿠르: 왕, 전역, 전쟁》(The King, the Campaign, the Battle)[73]에서 잉글랜드와 웨일스 군세가 최소 4대 1, 최대 6대 1의 수적 열세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제한 보랭의 기록(영국군 6,000명, 프랑스군 36,000명)을 선호했다. 베이커는 커리의 연구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실제 전투 병력 차이가 3~4배 이하였다면 목격자들의 증언이 무의미해진다고 지적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911)은 잉글랜드군이 6,000명의 궁수, 1,000명의 중무장 보병, 그리고 몇 천 명의 다른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프랑스군은 적어도 4배 이상의 수적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잉글랜드군 6,000명, 프랑스군 20,000~30,000명으로 추정하여 잉글랜드군이 4대 1 정도의 수적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고 본다.
아쟁쿠르 전투는 최소 7편의 당대 기록(3편은 목격자 기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투 위치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정확한 전투 장소에 대한 논쟁이 있다.[9] 전투 직후 헨리 5세는 양군 전령들을 소환했고, 그들은 가장 가까운 요새화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전투의 이름을 '아쟁쿠르(Azincourt)'로 정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두 기록은 부르고뉴 출신 장 르 페브르 드 생레미와 앙그랑 드 몽스트레레의 기록이다. 영국 목격자 기록은 익명의 ''헨리 5세의 업적(Gesta Henrici Quinti)''에서 나온다. 최근 재평가에서는 이 세 기록을 통합하여, 전쟁이 프랑스 왕위 계승 분쟁 해결을 위한 합법적인 적법 절차로 여겨졌다는 주장이 제기된다.[10]
프랑스는 참패했다. 약 6,000명이 전사했고, 사상자 명단은 "지난 세대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과 같았다. 3명의 공작, 9명의 백작, 1명의 자작, 대주교 1명 등 90~120명의 고위 귀족과 기수 기사가 포함되었다. 왕실 관리 중에는 프랑스 켄스테이블, 해군원수, 석궁병 대장(세 아들과 함께 전사), 왕실 가정 장관, 원수 예비대장이 사망했다. 전령들에 따르면 3,069명의 기사와 무장 기사가 전사했고, 최소 2,600구 이상의 시체가 문장이 없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남성 계승자가 끊긴 귀족 가문도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주 귀족 한 세대가 몰살되었다. 북부 9개 주요 도시의 집정관들이 아들, 친척, 지지자들과 함께 사망했다. 이 전투는 아르투아, 퐁티외, 노르망디, 피카르디의 프랑스 사회 지도자들을 대거 몰살시켰다.
포로 수는 700~2,200명으로 추정되며, 오를레앙 공작, 부르봉 공작, 외 백작, 뱅돔 백작, 리슈몽 백작(브르타뉴 공작의 형제이자 헨리 5세의 이복형제), 아르쿠르 백작, 장 마잉르 원수 등이 포함되었다.
영국 측 자료들은 사상자 수를 두 자릿수로 제시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최소 112명이 전사했고, 몽스트렐레는 600명의 영국군 사망자를 보고했다. 요크 공작, 서퍽 백작, 웨일스 무장 기사 다피드 ("데이비") 겜이 포함된다. 프랑스 측 기사 장 드 와브랭은 영국군 사망자 수가 1,600명이라고 썼다.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복잡했다. 헨리는 잉글랜드 귀환을 우선시하여 즉각적인 추가 정복은 없었다. 11월 16일 잉글랜드 귀환 후, 23일 런던에서 개선식으로 환영받았다. 헨리는 정복자로 돌아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고, 신하들과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열강에게 영웅으로 비춰졌다. 이는 랭커스터 왕가의 정통성과 프랑스에서 "권리와 특권" 추구를 위한 미래 원정을 확립했다. 전투 직후 아르마냐크와 부르고뉴 당파 간 휴전이 깨졌다. 아르마냐크 당파가 피해를 입고 패배 책임을 져야 했다. 부르고뉴 당파는 기회를 이용하여 전투 후 10일 이내 군대를 소집, 파리로 진격했다. 프랑스의 단결 부족으로 헨리는 18개월 동안 군사적, 정치적으로 새로운 원정을 준비할 수 있었다. 원정 시작 시, 전투로 인한 노르망디 정치, 군사 구조 피해로 더욱 용이해졌다.
5. 1. 잉글랜드군 규모에 대한 논쟁
앤 커리(Anne Curry)는 2005년에 출간한 《아쟁쿠르, 새로운 역사》(Agincourt, A New History)에서 이전까지의 역사가들이 아쟁쿠르 전투에 대해 주장한 것에 대해 반박하며, 영국이 아쟁쿠르에서 거둔 승리가 거의 6세기 동안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68][69]커리는 동시대의 명령기록을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군보다 여전히 수적 우위에 있었으나, 그 우위는 이전의 규모와는 다르게 3대 2 정도(프랑스군 12,000명 대 잉글랜드군 7,000~9,000명)였다고 주장한다. 커리에 따르면 아쟁쿠르 전투는 "왕으로서 헨리 왕이 이룩한 업적이 만들어놓은 신화"였다. 1599년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에서 묘사된 아쟁쿠르 전투의 잉글랜드군 희생자 수는 영국 대중문화에서 확고한 믿음을 얻었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5세의 유명한 대사 "우리는 적고, 우리의 행복은 작으나, 우리는 형제이다(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를 삽입하며, 60,000명의 프랑스군에 맞서 잉글랜드군이 12,000명이었다고 묘사했다. 셰익스피어는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의 사상자 수도 과장했다. 전투가 끝날 즈음[71] 헨리는 전령으로부터 프랑스군 10,000명이 전사했으나, 잉글랜드군은 5명 혹은 20명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는다.[72]
줄리엣 베이커는 《아쟁쿠르: 왕, 전역, 전쟁》(The King, the Campaign, the Battle)[73]에서 잉글랜드와 웨일즈 군세가 "적어도 4대 1, 가능한 한 많이 잡는다면 6대 1" 정도의 수적 불리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제한 보랭이 제시한 프랑스군의 규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선호하는데, 이 기록에는 영국군이 6,000명, 프랑스군이 3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베이커는 "보랭의 기록에 기초해 볼 때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군보다 6배 정도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커리의 책은 너무 늦게 출간되어 베이커의 연구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베이커는 커리의 연구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쟁쿠르 전투에 관한 많은 자료들은 잉글랜드군 약 6,000명, 프랑스군 약 36,000명으로, 프랑스군이 6대 1의 수적 우위를 보였다고 기술한다.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lopædia Britannica)은 잉글랜드군이 6,000명의 궁수, 1,000명의 중무장 보병, 그리고 몇 천 명의 다른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프랑스군은 적어도 4배 이상의 수적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잉글랜드군이 6,000명이고 프랑스군이 20,000~30,000명 정도로, 잉글랜드군이 4대 1 정도의 수적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고 본다. 커리는 연대기보다는 명령기록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유일한 학자이지만, 영국에서 수적 차이가 4대 1보다 적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커리는 동원명령에 응한 프랑스 지방의 숫자는 포함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확한 군대 규모를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좋지 않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아쟁쿠르 전투에 참전한 병력 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1차 사료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적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반면, 앤 커리(Anne Curry)는 2005년 저서 『아쟁쿠르: 새로운 역사(Agincourt: A New History)』에서 남아 있는 행정 기록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프랑스군이 1만 2천 명, 영국군이 9천 명이었으며, 그 비율은 4:3이었다고 주장했다. 릴 대학교 중세사 교수인 베르트랑 슈네르브(Bertrand Schnerb)는 커리가 사용한 정확한 숫자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프랑스군은 아마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줄리엣 바커(Juliet Barker), 조나단 섬프션(Jonathan Sumption), 클리포드 J. 로저스(Clifford J. Rogers)는 커리가 행정 기록에 의존한 것을 비판하며, 이 기록들은 불완전하고 이미 여러 개의 이용 가능한 1차 사료들이 참전 병력 수에 대한 신뢰할 만한 평가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언 모티머(Ian Mortimer)는 커리의 방법론을 지지하면서도 더 자유롭게 적용했는데, 그녀가 "프랑스군의 수를 최소화(기본 군대와 몇몇 특정 추가 부대의 수치로 제한)하고 영국군의 수를 최대화(하르플뢰르에서 본국으로 돌려보낸 병력 수가 병자 명단보다 많지 않다고 가정)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가장 극단적인 불균형이라고 할 만한" 것은 프랑스군 1만 5천 명 대 영국군 8천~9천 명이라고 결론지었다. 바커는 "만약 차이가 실제로 3대 4 정도로 적었다면, 이것은 목격자들과 당대인들이 묘사한 전투의 경과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언급했다.
바커, 섬프션, 로저스는 모두 영국군이 아마 6천 명이었을 것이며, 그중 5천 명은 궁수이고 900~1천 명은 기사였을 것이라고 기술했다. 이러한 수치는 『헨리 5세의 업적(Gesta Henrici Quinti)』과 장 르 퍼브르(Jean Le Fèvre)의 연대기에 근거한 것으로, 이 두 편은 영국 진영에 대한 유일한 두 개의 목격자 기록이다. 커리와 모티머는 『헨리 5세의 업적』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 책이 얼마나 헨리 5세를 위한 선전물로 쓰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헨리 5세의 업적』이 전투에 참여한 프랑스군의 수를 크게 과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책에서 전투 당시 영국군 궁수와 기사의 비율은 하르플뢰르 공성 전투 이전 영국군의 비율과도 다르다. 모티머는 또한 『헨리 5세의 업적』이 하르플뢰르에서 영국군 사상자 수(5천 명)를 크게 부풀렸다고 생각하며, "행군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병이나 죽음으로 인해 매우 적은 수의 병사만 잃었고, 160명 이상이 도중에 포로로 잡히지 않았다는 독립적인 증언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로저스는 5천 명이라는 숫자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유사한 역사적 사건들을 제시하고, 바커는 커리가 의존하는 단편적인 급료 기록이 실제로 더 낮은 추정치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군의 수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덜 엇갈린다. 로저스, 모티머, 섬프션은 모두 프랑스군 기사 수를 목격자인 베리 공작(John, Duke of Berry)의 전령의 기록을 근거로 1만 명 정도로 제시한다. 이 수치는 다른 많은 당대 기록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커리, 로저스, 모티머는 모두 프랑스군에 4천~5천 명의 투척병이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따라서 섬프션은 생드니 수도원의 수도사인 미셸 핀투앵(Michel Pintoin)의 기록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이 1만 4천 명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모티머는 1만 4천 명 또는 1만 5천 명의 전투 병력을 제시한다. 특히 혼란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는 것은 양측의 종자 수 또는 종자를 전투원으로 간주해야 하는지 여부였다. 프랑스군은 영국군보다 훨씬 많은 기사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따라 훨씬 많은 종자를 동반했을 것이다. 로저스는 1만 명의 기사 각각이 무장하고 갑옷을 착용한 기마 종자(무장하고 갑옷을 착용하고 기마한 군 종자, ''gros valet'')와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시종을 동반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전자를 전투원으로 계산하여 프랑스군의 실제 병력이 2만 4천 명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영국군이 적어도 4대 1로 열세였다고 믿는 바커는 무장한 종자들이 전투에서 후위를 형성했다고 말한다. 모티머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시종만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들은 전투 중 예비 말을 타고 있었고 영국군에 의해 잘못 전투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6. 대중문화 속의 아쟁쿠르 전투
이 전투는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전투 승리 직후 여러 인기 민요가 만들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5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아쟁쿠르 캐롤"이다.[9] 이후 "헨리 5세의 프랑스 정복"을 포함한 다른 발라드들이 등장하면서 원정 전 테니스 공 선물 같은 특정 사건들이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9]
오늘날 아쟁쿠르 전투를 가장 유명하게 그린 문화적 묘사는 1599년에 쓰여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 4막에 나온다. 이 희곡은 왕위의 압박, 왕이 보여야 하는 모습(기사도적이고, 정직하고, 공정하게)과 왕이 때때로 행동해야 하는 방식(마키아벨리식으로 무자비하게) 사이의 긴장에 초점을 맞춘다.[10] 셰익스피어는 헨리가 프랑스 포로 중 일부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사건과 자신을 거리를 두려고 시도하는 것을 통해 이러한 긴장을 보여준다. 전투의 이 순간은 기사도 전통과의 결별이자 왕권의 역설에 대한 중요한 예로 묘사된다.[10]
셰익스피어의 전투 묘사는 현대성이라는 주제를 활용한다. 그는 현대적인 영국 왕과 그의 군대를 중세적이고 기사도적인 구식 프랑스 모델과 대조한다.[10]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헨리를 진정으로 영국적인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선 것으로 묘사하며, 전투에서 군주와 일반 병사 간의 유대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0] 그러나 원작 희곡에는 실제 전투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 비평가 로즈 짐바르도는 이를 "전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갈등은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9]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가장 영웅적인 연설 중 하나로 여겨지는 유명한 성 크리스핀의 날 연설을 소개하며, 헨리는 전투 직전에 자신의 병사들에게 감동적으로 연설하며 다가올 싸움에서 "형제의 무리"가 함께 뭉칠 것을 촉구한다.[9] 비평가 데이비드 마골리스는 이 연설이 "명예, 군사적 영광, 애국심, 자기희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묘사하며, 전투에서의 성공에 연대와 동지애를 연결한 영국 문학의 최초 사례 중 하나를 형성한다고 말한다.[9] 부분적으로 그 결과로 이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은유로 사용되었는데, 영국 원정군이 독일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시도가 이 전투와 널리 비교되었다.[9]
셰익스피어는 프랑스군이 1만 명, 영국군이 30명 '미만'의 사상자를 냈다고 언급하면서 사상자 수를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묘사하며, 헨리의 "오, 하나님, 당신의 팔이 여기에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유도한다.
2008년 영국계 미국 작가 버나드 코른웰은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과 전투 자체를 재구성한 ''아쟁쿠르''를 발표했다. 이야기는 주로 니콜라스 후크라는 영국 장궁병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셰익스피어의 아쟁쿠르 전투 묘사는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두 편의 주요 영화로 제작되었다. 후자는 모두 ''헨리 5세''라는 제목으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1944년 영화에서, 케네스 브래너가 1989년 영화에서 각각 주연을 맡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에 제작된 올리비에의 영화는 사라 하추엘이 "흥미진진하고 영웅적인" 톤이라고 표현했으며, 전투 장면은 인위적인 영화적 모습을 보여준다.[9] 브래너의 작품은 역사적 자료와 베트남 전쟁 및 포클랜드 전쟁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전투 자체를 더 길고, 보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묘사한다.[9]
2007년 영화 각색에서 피터 바바키티스 감독은 디지털 효과를 사용하여 전투 장면에서 사실주의적 특징을 과장하여, 아쟁쿠르 전투에 대한 보다 ''아방가르드''적인 해석을 제시한다.[9] 이 전투는 2019년 넷플릭스 영화 ''킹''의 중심적인 부분을 이루는데, 이 영화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헨리 5세로, 로버트 패틴슨이 비앵느의 도팽으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헨리아드 연극에서 영감을 얻었다.[23][24]
2010년 3월, 워싱턴 D.C.에서 헨리 5세의 전쟁포로 학살 혐의에 대한 모의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역사적 기록과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모두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며, 샘 앨리토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판사가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재판은 단순히 포로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청중 투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지만", 헨리 5세는 "변화하는 시민 사회의 기준"을 근거로 법정에서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5][26][27]
아쟁쿠르 마을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현대식 박물관이 있다.[28] 이 박물관에는 전투에서 사망한 양측 전투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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